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루살렘 왕국 (문단 편집) == 경제 == 우트르메르의 [[십자군 국가]]들은 상당히 척박한 지역에 건설된 국가이기 때문에, 초기에는 보급을 서유럽의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따라서 [[자급자족]]이 시급했는데 예루살렘 왕국의 시골에서는 [[밀]], [[보리]], [[콩]]류, [[올리브]], [[포도]], [[대추야자]]가 재배되어 소비되었고, 유럽과 중동의 중계 무역을 기반으로 상업 공화국들과 결합되어 상업적인 경제 발전이 크게 중요시 되었다. ||<:>[[파일:Crusader_coins_of_the_Kingdom_of_Jerusalem.jpg|width=100%]]|| || 왼쪽은 성묘 교회 문양의 데니어(Denier). 가운데는 동로마 제국의 베잔트(Bezant). 오른쪽은 십자가 문양의 디나르(dinars). || [[예루살렘]]은 유럽과 아시아 무역의 십자로였고, 유럽에서 십자군의 갑옷과 북유럽의 모직물 제품을, 중동에서 고급품들을 중계 무역했다. 특히 고가였고 [[술탄]]정도의 계급이나 걸칠 수 있었던 호화로운 다마스쿠스산 옷감이 유럽 전역의 성채로 빨려 들어갔다. 그 유명한 페르시아 [[양탄자]]는 유럽에서 대저택의 어둠침침한 벽에서 테파스트리가 되어 벽 전체를 도배하는 [[돈지랄]]이 유행하기도 했으며, [[향신료]]는 예루살렘 정복에 대한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믿었을 정도로 식생활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돈이라면 [[알라]]도 밀친다는-- 아랍 상인들은 이 거대한 시장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며 꿀을 빨았다. [[십자군]] [[예루살렘]]과의 무역을 통해 유럽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또다른 품목들로는 오렌지와 설탕이 있었다.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피사 공화국]], 후대의 [[한자 동맹]] 또한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애초에 상인 공화국들이 상선을 십자군에게 임대(당연히 공짜가 아니다...) 해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담으로 특히 [[베네치아 공화국]]이 [[예루살렘 왕국]]과의 'Pactum Warmundi'라는 상업 조약으로 쌍방이 무역에서 막대한 이익을 보장받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 [[베네치아 공화국|이탈리아 상인]]들은 꾸준한 수익을 얻기 위해서 다양한 분야에 분산 투자를 감행했다. 따라서 자본이 늘려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콜레간차'라는 자금 연대를 이용하여 투자를 강화해 나갔다. 이 연대에 교역업이나 운송업에 관련 없는 자들 - 이를테면, 의지할 사람 없는 과부나 매춘부 - 도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돈 있으면 다 참가가 가능해서 현대 [[주식]] 제도의 근간이 여기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예루살렘]]은 특히 [[비단]], [[면화]] 및 [[향신료]] 무역에 주로 관여했고 그로 인하여 걷히는 세금으로 왕국을 유지했다. 주변 도시들에게 공물 지불을 통해 돈을 걷었는데, 처음에는 아직 정복되지 않은 해안 도시에서 공물을 거뒀고 나중에는 십자군이 직접적으로 정복할 수 없었던 다마스쿠스와 이집트와 같은 다른 인접 국가에서 거두기도 했다. 시리아에서 이집트나 아라비아로 가는 무슬림 캐러밴에 대한 통행세도 빼먹지 않았다. [[예루살렘]]은 이러한 경제력으로 인력 부족이라는 갈증을 용병을 고용하는 비용으로 지불함으로써 부분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용병은 유럽의 십자군이나 유명한 투르코폴레스(Turcopoles)라 불리는 현지 투르크계 용병을 포함한 무슬림 병사도 있었다. 도로망이 특별히 개발되지는 않았지만 예루살렘 왕국을 지나는 고대 무역 경로를 활용한 중계 무역이 번성해 왕국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었다. 그들은 요르단 강 동쪽에 있는 왕국의 남동부를 통과하는 중요한 경로를 개방하여 무역 통로로 활용했고 이 길은 이슬람 순례자들의 [[메카]] 순례 경로로도 사용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